이리전쟁이 끝난 뒤 굴드와 피스크는 증권시장 작전계의 영웅이 됐다. 이들을 추종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월가에서 그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밴더빌트에게 한방을 날렸고 결국 협상을 이끌어 냈으며, 협상 결과로 그들의 스승이자 상사인 드루까지 축출했다.굴드와 피스크가 드루를 축출하는 과정의 드루에게 배운 수법이었다.
대량의 철도주식을 매도해 철도주가는 폭락했고 굴드는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공매도 포지션이었던 드루는 주가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해 그대로 포지션을 유지했는데 굴드와 피스크가 엄청난 돈을 풀어 철도회사 주식을 매수했다. 철도회사 주식이 급등하고 드루는 축출됐다. 드루를 축출한 굴드와 피스크는 정치인을 이리철도 이사회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6개월만에 이리철도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피스크와 굴드는 이후에도 과소비와 기행을 이어갔고 악덕 자본가로 이름을 날렸다.
1868년 금매집 시작
미국 연방정부는 남북전쟁기간 대규모로 발행된 그린백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그린백이 회수되자 그린백의 가치는 올라갔고 반대로 금값은 하락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농산물값도 상승했다. 농작물 운반으로 먹고사는 철도회사의 수익이 줄어들자 이리철도회사 사장이었던 굴드는 금값을 조종하기로 마음먹고 금을 매수하기 시작한다.
당시 굴드는 월가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금값 시세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굴드는 그랜트 미국 대통령의 여동생과 결혼한 코빈 장군을 포섭했다. 그에게 매집한 금의 일부 지분을 주었다. 코빈 대령 덕에 굴드는 대통령과의 친분을 만들어갔다. 자신의 요트와 별장으로 대통령을 초대해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 코빈 대령은 굴드의 사람인 버터필드 장군을 뉴욕 재무부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코빈 대령과 버터필드 장군은 이익금을 받고 작전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굴드는 피스크를 이 작전에 포함시키기로 한다. 평소 피스크의 성격 탓에 이번 작전을 오픈하지 않았던 굴드는 다급한 마음에 피스크를 불렀다. 굴드와 피스크는 그랜트 대통령의 개인비서 호레이스 포터장군을 매수하려고 했지만 그는 호통을 치며 거절했다.
정부는 굴드의 바람과는 반대로 금값 하락 자세를 유지했다. 다급해진 굴드는 코빈 대령을 겁박해 그의 아내를 시켜 정부는 금 매각을 당장 멈추라는 내용의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낸다. 대통령은 편지를 받고 극대노 했고 여동생에게 코빈 대령의 금투기를 멈추라고 호통했다. 이 소식을 코빈 대령으로부터 들은 굴드는 비밀리에 금매각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시 굴드가 피스크에게 금 매각을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호사가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피스크가 굴드의 의중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몰랐는지 토론을 한다. 피스크의 금 매수가 계속 진행될 동안 굴드는 금을 비밀리에 매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스크 역시 자신의 개인 중개인인 윌리엄 벨든에게만 금을 매수했고 아무 서류도 남기지 않았다.
1869년 9월 23일 갑작스러운 금값 폭등에 수많은 중개인들은 파산했다.
제이 굴드의 검은 금요일
1869년 9월 24일 피스크는 이날도 자신의 중개인인 앨버트 스페이어를 통해 금을 매수했다.
오전 11시 금값의 변동이 시작됐다. 버터필드 장군의 브로커가 금 매도를 시작했다. 뉴욕 재무부의 버터필드 장군 브로커의 금 매도는 정부가 금매도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굴드는 매도를 피스크는 매수를 진행중이었다.
이때 재무장관 조지 보트웰이 400만달러 치 금을 매각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금값은 패닉에 휩싸였다. 군중들은 굴드와 피스크의 사무실로 몰려들었고 폭도로 변했다.
이날을 제이 굴드의 검은 금요일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아는 미국 추수감사절 주에 있는 블랙프라이데이 명칭이 뒤늦게 대중화됐던 이유는 1869년 금값 대폭락을 블랙 프라이데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가설이다)
이날 대폭락으로 많은 투기꾼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제이 굴드와 피스크는 사정이 달랐다. 두사람의 작당모의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두 사람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수익을 거뒀다.
피스크는 서류한 장 남기지 않고 매수를 진행한 덕에 모든 계약을 파기했다. 모든 피해는 그의 중개인들이 짊어졌다. 그의 중개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윌리엄 벨든은 파산했고 앨버트 스페이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자가 됐다. 피스크는 자신의 중개인에 모든 피해를 떠넘겨서 직접 피해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3년뒤 동업자와 다툰 뒤 살해당한다.)
굴드는 금 매도로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번일로 수많은 소송에 시달렸지만 그의 재산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제이 굴드의 말년도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에 비할 수 없다.
투기를 좋아하고, 부자를 시샘하지 않으며,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재산도 리스크를 무릅쓰고 투자하는 게 미국인이다. 하지만 그런 미국인이라 할지라도 배부른 돼지와 같은 월가를 마냥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악덕 자본가로 이름을 날리던 제이 굴드와 제임스 피스크가 벌인 금값 조종 작전의 후폭풍인 “블랙 프라이데이는”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월가의 오명으로 남게 된다.
1869년 06월부터 1870년 12월까지가 경기침체 기간이며 총 1년 6개월이다. 침체 기간 주가는 -12.74% 하락했다.
이전 고점에서 침체가 시작되던 시점까지 6개월간 주가는 -2.23% 하락했다.
이전 고점에서 침체가 종료되던 시점까지 2년간 -15.24% 하락했다.
이전 고점에서 침체 기간 최저가는 1년 5개월간 -16.54% 하락했다.
만약 침체 기간 최저점에서 만약 매수를 하고 최고점에서 팔 수 있었다면? 50.1%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기간은 11년 이다. 고점 회복 후 장기침체를 만나 오랜 세월 하락을 이어간다.
https://hedonia.tistory.com/36
경기 침체의 정의
영화 "베테랑" 에서 조태오 역을 맞은 유아인은 영화중에 이런 대사를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매년 올해가 제일 지독하고 올해 경기가 제일 안좋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안빼고 들었어요". 생각
hedonia.tistory.com
경기침체의 정의는 위 글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경기침체 공식 선언은 7~15개월의 시차가 있다.
경기침체가 선언되는 시점은 침체가 이미 7~15개월 진행됐거나 이미 종료된 후라는 말이다.
그럼 침체 시점에서 7개월 그리고 15개월 후 주가는 어떻게 변했을까?
침체가 시작되고 7개월 후 주식을 매수했다면 전고점 도달까지 11년 4개월이 걸렸고 46.2%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여러 번 말하겠지만 바닥에서 사서 천장에서 파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번과 같이 전고점을 향해 가는 중 장기간의 침체를 만날 수 있다.
다음은 침체 후 15개월이 지난 뒤 매수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전 고점까지 45.26%의 상승을 보였다. 기간은 10년 9개월 소요됐다.
cowles commission 지수를 참고해서 차트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1918년까지는 cowles commission 지수를 참고해 만들었습니다. 차트는 월봉입니다. 이를 감안하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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